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 (문단 편집) === 네덜란드의 왕비 === [[파일:Anna_Pavlovna_(by_Nicolaas_Pieneman).jpg|width=500]] 1840년에 시아버지 [[빌럼 1세]]가 퇴위하면서 네덜란드의 왕비가 되었다. 안나는 왕비가 되어도 공비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 유럽의 외국인 출신 왕비들이 정치에 개입해서 좋은 소리 들은 일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현명한 행보였다. 하지만 이는 처신을 잘해서라기보다 개입하고 싶어도 못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배우긴 했지만 안나는 끝끝내 [[네덜란드어]]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대중들과 소통하는 일이 없었으며, 권위적인 성격 탓에 안나는 인기있는 왕비는 아니었다고 한다. 장남 [[빌럼 3세]]와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리고 며느리인 [[뷔르템베르크의 조피]]를 매우 싫어해서 빌럼 3세가 그녀와 결혼할 때 크게 반대했다. 안나는 장남의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로 조피가 빌럼 3세의 사촌이며, 정교회에서는 사촌간의 결혼을 금지한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이는 핑계에 불과했는데 애초에 빌럼 3세는 정교회 신자도 아니였고, 안나의 딸 소피가 사촌인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에게[*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대공 카를 알렉산더. 안나의 언니 [[마리야 파블로브나 로마노바(1786)|마리야 파블로브나]]의 아들로, 소피와는 이종사촌 지간이다.] 시집갈 때는 아무 말도 안 했기 때문이다(...). 안나가 이렇게까지 조피를 싫어한 이유는 그녀가 바로 자신의 형제자매들 중에서 가장 싫어했던 언니 예카테리나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고부갈등으로 삐걱거린 빌럼 3세와 조피의 결혼 생활은 이후에도 좋지 않았다. 1848년에 안나가 가장 아끼는 자식이었던 알렉산더르 왕자가 요절했다.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인 1849년에 남편 빌럼 2세가 급사하면서 안나는 궁에서 나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